5월 선재문화답사 일정

2015년 선재문화답사(4)

<백제문화의 보고를 찾아서>

일자: 5월17일(셋째일요일)

장소: 무령왕릉(공주), 정림사지5층석탑(부여),

궁남지(부여), 관촉사(논산)

출발: 부산진역앞 오전 6시

회비: 5만원(중식제공)

 

(일정표)

06:00 부산진역 앞 출발

10:00 무령왕릉(공주)

11:30 정림사지오층석탑(부여)

12:30 점심

14:00 궁남지(부여)

16:00 관촉사(논산)

17:30 부산으로 출발

21:30 회향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하며 사적 제13호, 송산리고분군에 포함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중국 양(梁)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이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피장자가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구조를 보면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무덤에 들어가는 연도(羨道)가 부설되어 있는 철(凸)자형의 전축(塼築) 단실묘(單室墓)이다.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이다. 무덤의 현실은 남쪽의 벽면에서 109㎝ 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보다 21㎝ 정도 한단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를 조성하였다.

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작은 화염문을 채색한 보주형 벽감과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한 살창(유자창)을 시설하였다. 특히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연화문이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의 막음벽돌 중에는 무문전과 제6호 벽돌무덤의 벽돌과 동일한 전범문 벽돌이 꽤 많이 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무덤 안에서는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金松)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다. 중석 위에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껍다.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처럼 경쾌하다.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擦柱孔)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궁남지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연못의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된다.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섬인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그 섬 가운데 방장선산을 본따서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궁남지는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최고의 궁원지(宮苑池)로, 조성 기록이 명확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조경기술과 도교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궁남지의 조경기술은『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에 알려져 일본 원지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한다.

 

관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과 함께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 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이 밖에 영험담은,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386년(우왕12) 법당을 신축하였고, 1581년(선조14) 거사(居士) 백지(白只)가 중수하였으며, 1674년(현종15)지능이, 1735년(영조11)성능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사명각·해탈문·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拜禮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문(石門), 오층석탑·사적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배례석은 너비 40㎝, 길이 150㎝의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연화 3개가 연지(蓮枝)에 달려 있는 듯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또 해탈문인 석문은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창건 때 쇄도하는 참배객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던 것 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백제 무령왕>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동성왕(東城王)의 둘째아들, 또는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한다.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무령왕 정권의 탄생은 동성왕의 시해라는 정변을 통해 이루어졌다. 501년 12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정변에는 왕족과 한성(漢城)에서부터 내려온 귀족, 웅진(熊津)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연루되었다.

무령왕은 이듬해 1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해 저항을 꾀하던 백가를 토벌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501년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고, 503년 마수책(馬首柵)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 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 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해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말갈과의 싸움은 그 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합세해 한성을 치고자 횡악(橫岳)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에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해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는데, 이 때 이를 독려하기 위해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 유역의 어느 곳이거나 가야 지역으로 짐작된다. 513년과 516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였다.

무령왕은 정치 형태를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무령왕 때 추진된 정치적 변화 중의 하나는 직책을 가진 좌평이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천도 이후 일어난 두 차례 반란은 모두 병관좌평(兵官佐平), 위사좌평이라는 관직을 가진 좌평에 의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지배귀족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좌평이 되었고, 다시 좌평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구조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좌평제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좌평을 지배귀족들의 신분서열을 나타내는 관등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행정 업무는 22부사(部司)가 전담할 때 최고의 신분을 가진 귀족이 실권마저 장악하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좌평제를 22부사제로 개혁하는 안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지배층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했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망(流亡)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진휼을 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고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완비함으로써 금강유역권을 개발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왕정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또 무령왕 9년(509)에는 임나(任那) 지역에 도망가서 호적이 끊긴지 3∼4세대가 지난 자를 찾아내서 호적에 올리도록 하였다. 도망간 백제의 백성을 찾아내서 다시 백제로 옮기어 호적에 편입시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나 지역에 대한 호구조사(戶口調査)를 하고 있다면 백제 영역 내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 이전부터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드는 조치들이 이미 실시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령왕 때에는 전국적인 호구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호적체계를 정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정책의 추진으로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승하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선재문화답사(보성지역)

 

2015년 선재문화답사(3)

<보성 차문화와 구비문학>

일자: 4월12일(둘째일요일)

장소: 보성차밭(차박물관), 열화정,

벌교홍교, 득량만(구비문학,강동마을민요).

출발: 부산진역앞 오전 7시

회비: 4만5천원(중식제공)

 

(일정표)

07:00 부산진역 앞 출발

10:30 보성차밭(차박물관)

12:30 보성식당

14:00 열화정(들차회)

15:30 득량만

16:30 벌교홍교, 부용교

17:30 부산으로 출발

21:30 회향

 

보성차밭(차박물관)

전남 보성차밭이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 방문 시 꼭 가 봐야할 곳 50선’에 선정됐다.

CNN은 “대한민국의 40%정도 되는 녹차가 보성의 차 밭에서 자란다”며 “무성한 녹차 밭은 드라마나 광고 또는 영화의 촬영지로 애용돼 왔으며 사진작가들의 명소로도 알려진 곳”이라고 소개했다.

또 “보성 차밭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바로 끝없이 펼쳐진 녹차 밭 때문”이라며 “매해 5월에는 녹차 축제가 열린다”고 덧붙였다.

보성차밭은 지난해에만 311만 9000여명의 관광객이 방문한 관광명소로 사계절 내내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참새 혀 같은 연둣빛 잎이 나오는 봄 차밭도 좋지만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순백의 차 꽃이 핀 차밭이나 눈 덮인 차밭도 운치가 있어 계절에 상관없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열화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62호. 일각대문과 ㄱ자형의 누마루집으로 이루어진 정면 4칸, 측면 2칸 정자이다. 위치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간직한 마을 뒤, 깊숙한 숲 가운데 자리하며 강골마을의 공동소유이다. 조그마한 실개울을 따라 올라가다 동향하여 일각대문이 서고 그 뒤에 마당을 지나 정자가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다.

정자는 간살이가 세로칸은 맞걸이로, 가로칸 구들부분은 전퇴구조로 하였는데, 뒤쪽으로는 헛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헛퇴를 달아내었다. 평면구성은 가로칸 복판 2칸을 구들로 하여 아랫방과 윗방으로 하고 세로칸 2칸은 누마루가 된다.

가로칸 앞퇴는 툇마루가 시설되었고, 구들 아래퇴에는 구들에 불을 지피기 위한 굴뚝공간이다. 아랫방 뒤는 골방이고, 윗방과 누마루 뒤퇴는 누마루가 만들어졌다. 누마루의 앞과 양측면에는 쪽마루를 내밀어서 계자각 난간을 시설하였다. 집은 자연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며 높은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굴도리 아래에 장여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수장(장여)모양의 창방을 보냈다. 중도리는 장여만 받쳤으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지지되었다.

들보는 네모꼴로서 모를 죽인 정도이고 굽은 부재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팔작이다. 마당 앞에는 아담한 일각대문·연못, 정원에는 벚·목련·석류·대나무 등이 주변의 숲과 어울려 전통적인 우리나라 조경의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득량만 (구비문학)

구비 문학은 기록 문학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기록 문학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구비 문학과 기록 문학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나라마다 달라서, 거의 구비 문학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문학의 범위를 기록 문학만으로도 사실상 큰 지장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국문학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구비 문학과 기록 문학을 아울러 발전시켜 온 문학이다.

 

구비 문학은 말로 전해지는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구전 문학(口傳文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비 문학이라는 용어를 택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구비’라는 말의 어원은 비석에 새겨 놓은 것처럼 오래도록 전해 온 말을 뜻한다. 돌에다 새긴 비석보다 말에다 새긴 비석이 더욱 진실되다는 생각에서, 옛 사람들이 ‘석비(石碑)’에다 빗대어 ‘구비’라는 낱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한 구비는 ‘구전심비(口傳心碑)’를 줄인 말이다. 말로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마음에다 새긴 것처럼 절실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그런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결국, 구비 문학은 단순한 구전이 아니고, 절실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연을 일정한 형식이나 구조를 갖추어서 나타내는 문학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구전되는 것 중에서 설화·민요·무가·판소리·민속극·속담·수수께끼만을 구비 문학이라고 한다.

구비 문학을 민속 문학(民俗文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민간전승인 민속을 전승 방식으로 분류하면, 물질 전승, 행위 전승과 함께 구비 전승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민속을 그 구성요소에 따라 나누면, 민속 공예, 민속 음악 등이 있듯이 민속 문학도 있다.

 

구비 문학을 유동 문학(流動文學), 표박 문학(漂泊文學), 적층 문학(積層文學) 등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구전되면서 거듭 창작되기 때문에 그 모습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거듭 창작될 때마다 내용이 누적되어 간다는 특징을 들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구비문학은 특정인이 어느 때 창작해 글로 정착시킨 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유동적이고 표박하고 있으며 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비 문학은 구연되는 현장에서 존재하는 문학이다.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구비 문학의 작품은 두 가지 개념의 복합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유형으로서의 작품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며, 특정 시기의 사정만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을 기억했다가 누가 어느 시기에 구연하는 개별적인 작품인 각 편(各篇)은 구연자 자신이 지금 내놓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작품은 유형으로서의 보편성과 각 편으로서의 특수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구연은 혼자서 즐기자는 것이 아니어서 청중이 필요하며, 청중이 구연 내용에 관여하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면 청중을 자신이 뜻하는 방향으로 이끌면서 자기의 재능을 발휘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비문학은 공동의 것이면서 또한 개인의 것이다.

한편, 구연을 할 때는 생활상의 필요성과 관련된 일정한 상황이 주어진다. 모내기를 하면서 모노래를 부르고, 일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구연 내용은 상황에 의거하면서 동시에 상황을 넘어서기도 한다. 기능적인 민요라고 해서 기능 수행에 꼭 필요한 사설로만 엮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두루 종합해 보면 구비 문학은 보편성과 특수성, 구연자와 청중, 자기 표현 의지와 상황 사이의 긴장된 관계에서 존재하는 가변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구비문학은 국문학의 저층을 이루어 왔다. 구비 문학은 기록 문학이 없이도 존재하지만, 기록 문학은 구비 문학이 선행하지 않고서는 생겨날 수 없었다. 한문이 전래되기 전의 국문학은 온전히 구비 문학이었다. 그 중에서 건국 신화 또는 건국 서사시라 할 수 있는 것이 고대 문학에서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구비 문학이 국문학의 저층이라 함은 구비 문학이 민중의 문학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민중은 좁게는 생산 활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넓게는 한문으로 이룩된 상층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생산 활동과 구비 문학의 관계는 민요를 통해 잘 나타난다.

민요는 원래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고, 고기잡이를 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행동을 통일하고 흥을 돋우기 위한 노동요로 시작되었다.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유희요나, 의식을 거행하면서 부르는 의식요라도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민중만의 노래로서, 노동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민요는 일하는 사람의 의식을 나타낸다.

이들은 상층 문화와도 접촉을 가지면서 노래나 놀이를 생활 수단으로 삼았으므로 유식한 문구를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현거리로 삼으면서 뜻하는 바가 단순하지 않은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구비 문학은 다른 자료를 통해서는 거의 엿보기 힘든 하층 민중의 의식을 알아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 또한, 외래 문화가 상층을 통해서 수용될 때 온통 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는 민족적 저력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에서 구비 문학은 소중하다.

구비 문학의 위기는 근대화가 농촌 지역에서까지 진행되면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농사짓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농업 노동요마저 지속되기 어려운데다 전파 대중 매체가 새로운 흥미거리를 제공하게 되어 스스로 노래부르고 이야기할 기회가 적어지고 있다.

판소리나 탈춤 같은 것은 도시로 진출했으나 새로운 창작은 막혀 버렸다. 무가는 무당이 불신되면서 그 명맥이 위험하게 되었다. 민요와 설화 중 설화는 전승 상태가 비교적 나은 편이나 앞으로는 대부분 그냥 사라지고 말 것이다.

 

<득량면 민요> 오봉리 강동마을 □ 상여 소리 에~이 어허 에~이 어허 에~이 어허 관암보살 관암보살 청록 어찌다 관암보살 무정허네 염라대왕이도 관암보살 극락세계가 한번가시면 관암보살 극락산천이 건너간산이 관암보살 챙경 잊지는 못하고 관암보살에헤이 어~허 에헤이 어~허 에헤이 어~허 수정수를 잊어버려 야속허니 무정허~네 그렇게도 또다시 무정허니 북망이로구나 찬양루를 떠나가누나 에헤이 에헤이 에헤이 갈꺼나 멀어서 못오누나 어~허 왜이가리 어이갈꺼나 황성천리길 어~너 왜이가리 어~너 왜이가리 쑥대머리 적막옥방에 어~너 왜이가리 만고상산에 산신산이가 어~허 왜이가리 자진석황 그누구가 어~너 왜이가리 백발귀신 그누구가 어~너 왜이가리 장항목판을 산천꽃이 어~너 왜이가리 나무애미타불 나무애미를어허 넘처 어이갈까 어이가리 어~너 넘차 어화너 넘차 귀신현용 천자리에 너화너 넘차 유람하고 어느멘고 어화너 넘차 건성제가 떠나가네 어화너 넘차 구경산천 떠나가네. 어화너 넘차 지고 떠나지나가네 어화너 넘차 삼십홀로어화너 너화너 너화너 너화너 하여야만 염라대왕 애야 끝에상을 애야허니 처량하지 처량하네 나무애미타불

[언덕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

관음보살 천지재고 애절하네 석양산곱게 정토정산 천지재고 고성재화 임성천하 대장공세 화천봉공 극락세계 읍성천보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벌교홍교

보성 벌교 홍교(寶城 筏橋 虹橋)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조선 시대의 아치교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홍교는 벌교천 위에 걸쳐진 돌로 만든 무지개 다리로 전체길이 27m, 높이는 약 3m, 폭 4.5m 내외이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다리를 놓아 사람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을 중요한 보시로 꼽고 있다.

이 홍교는 영조 13년(1737년)과, 다시 헌종 10년(1844년)에 고친 바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쳐 보수하여 원형을 찾은 것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돌다리이다. 홍교가 놓이기 이전에는 뗏목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고 하는데 벌교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화두에 대하여

화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청화 큰스님

 화두(話頭)란 것도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중국 송나라때 나왔습니다.
화두를 지금 놔야 한다는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하십시오.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화두를 자기 할아버지가 했다든가,금생에 자기 스승이 했다든가,
또는 전통적으로 우리 종단에서 했다든가 하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인습적으로 묵수(墨守)해서 덮어놓고 따라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화 시대는 지적인 정보를 가지고 정사(正邪)를 따져야 합니다.
비판해서 가려야 합니다.
화두라는 것은 중국 송나라때 대혜종고 스님이 비로소 정형화를 시켰습니다.
또 송나라 때도 다 화두를 한 것이 아니라, 대혜종고 스님 일파에서만 화두를 정형화시켜 유도했습니다.
그 당시도 저사(抵死)해서 화두를 반대한 스님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화두없이 잠자코 마음을 관조 하자는 조동종의 천동정각(天童正覺)이었고, 또 하나는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 화두를 해라 하시고 나선 분은 대혜종고 스님과 같은 시대의 진헐청요(眞歇淸了)스님 이였습니다.

 진헐스님은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 화두(四字名號)를 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이기 때문에 또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니까,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의심만 주로 하는쪽이 아니라 부처님을 일백퍼센트 신뢰하는 아미타불 화두를 하라 하면서, 아미타불 화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를 지나 명나라 때가 되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송나라 때보다 고승이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바로 화두를 한 그 파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고승들의 종파는 같은 화두파였는데, 그 분들은 다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운서주굉(雲捿株宏)스님 감산덕청(敢山德淸)스님
지욱우익(智旭우益)스님 자백진가(紫柏眞可)스님,
이 네분이 명나라 때 사대 고승입니다.
사대 고승이 다 한결같이 염불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불교를 창도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어찌하여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송나라 때가 한국으로 치면 고려 때에 해당합니다.

당시 대혜종고 스님이 이끄는 세력이 제일 강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법을 배울 때 그 중 세력이 제일 강한쪽에 가서배우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그 화두하는 쪽에 가서 배워 왔습니다. 그때는 마침 한국은 고려 말엽으로 그후새로운 정치세력인 이씨 조선이 서고, 이조 오백년 동안에는 고려때 불교의 잘못이나, 부패한 과보로 배불(排佛)이라, 유교인들에게 핍박을 당해서 스님들이 도성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불교가 발전 할수 있겠습니까. 중국은 원나라,명나라,청나라 때 불교가 가장 왕성했습니다.
불행히도 명나라 때 불교가 우리나라에 못들어왔습니다.

 설상가상 으로 일제 강점기 삼십육년간 이나 또 팔일오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발전을 못했습니다.

 어떤 스님네는 화두를 한번도 안해보고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고 합니다. 한국 선방의 모습이 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선방에서도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한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가 한 것도 아니고,
육조대사가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에도 화두란 말은 한마디 없습니다.

말(언설)에 대하여

 

 

말에 대하여

하나.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뒤’에서도 하지 마라.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아닌가’는 뒷담화인가 아닌가의 좋은 기준이다.
칭찬에 발이 달렸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있으니
상대가 앞에 없더라도 허물은 덮어주고 칭찬은 자주하라.

둘.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굿토커(good talker)’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굿리스너(good listener)’가 되는 것이다.
말을 독점하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들을수록 내 편이 많아진다.

셋.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된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옛말이다. 흥분하지 마라.
낮은 톤의 목소리가 힘이 되는 법이다.

넷.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해라.
상대방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보다는
상대에게 정말 필요하면서도 마음에 남는 말을 해라.

다섯.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을 하자.

여섯. ‘뻔’한 이야기보다 ‘펀(fun)’한 이야기를 해라.
자신이 하는 말에 스스로가 재미있어야 한다.
‘펀(fun)’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 즐겨야 한다.

일곱. 말을 ‘혀’로만 하지 말고, ‘눈’과 ‘표정’으로 말해라.
비언어적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언어적인 요소보다는
시각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여덟. 입술의 ’30초’가 마음의 ’30년’이 된다.
학교나 군대, 회사 등 여러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조직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말’이다.
내가 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아홉. ‘혀’를 다스리는 것은 나지만, 내뱉어진 ‘말’은 나를 다스린다.
말은 항상 신중하게 하라.
당신이 뱉은 말은 곧 당신의 그릇과 인격을 나타낸다.

욕심내려놓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히치 하이킹(승차요청)을 했더니
조수석에 국회의원이 앉아있고,
깜짝 놀라 운전석을 보니
대통령이 앉아있었다.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우루과이에 거주하고 있는 ‘헤랄드 아코스타’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 출근했으나
신분증 기한 만료로 작업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더위를 피해 히치 하이킹을 시도했고,
관용차 한 대가 그를 태워줬다.

차 안에 들어선 헤랄드는
깜짝 놀라고 만다.

운전석에는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조수석에는 부인인 루시아 토폴란스키 상원의원이 있었다.

헤랄드는 그때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대통령이 나를 차에 태워줬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하니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대통령 부부는 매우 친절했다.
그날 하루 동안 비록 일하지는 못했지만,
이 짧은 여행은 더없이 소중하고 유쾌했다”

자신의 월급 상당수를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진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다.

지난 5년의 재임 중에 받은 월급의
약 6억 원을 기부했고,
이 중 4억3천만 원은
서민들을 위한 주택 건설 사업에 사용됐다.

올해 초 신고된 재산은 약 3억 5천만 원인데
이 중 1억5천만 원은 농장이고
나머지는 약간의 현금과 트랙터 2대, 농기구,
1987년형 오래된 자동차 한 대 등이다.
이 중 농장은 부인 소유다.

그는 호화로운 대통령 관저 대신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을 느끼기 위해
여전히 농장에서 지내고 있다.
그가 기부하는 이유도
평범한 시민들의 평균 소득에 맞춰 살기 위해서다.

또, 지난해 아랍의 부호로부터
대통령의 오래 된 차를
100만 달러에 사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 사실이 화제를 모으자 그는
“내가 타는 차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바란다.
모든 자동차에는 가격이 붙어 있지만,
삶에는 가격이 없다”고 말했다.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인간의 삶의 문제에 더 많이 고민하라는 뜻이다.

– VINGLE / 뉴스와 이슈에서 / 김지영 정리 –

—————————————–

무히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 살아가는 가치! 가슴에 짠~합니다 –

그릇이론

그릇 이론 

그릇 비우기: 비움을 통한 자기정화

수행을 향한 첫걸음은 참회입니다. 그릇에 어떠한 물건이 이미 가득 채워져 있

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내 마음의 공간도

이미 번뇌 덩어리로 차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릇 채우기: 발원

참회와 하심을 통하여 마음이 비워진 후에는 발원을 해야 합니다. 발원은 자기

전환의 시작입니다. 업생(業生)에서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의도적으

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창조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릇 키우기: 발원에 의한 자기 확장

참회를 통해 비운 그릇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마음에 안주해있던 스스로를 바꾸어 커다란 큰 그릇(큰마음)으로 대치하

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과의 만남이 절대적입니다.

선지식이란, 내 마음을 열어주는 모두가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릇 깨뜨리기: 수행을 통한 자기 확인

그릇을 아무리 키운다해도, 결국 그릇이 존재하는 한, 안과 밖이 있습니다.

나와 남이 있고, 선과 악이 일어납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를 체득코자 한다면

시비분별이 사라져야 하고, 그릇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망념에 집착치 않고 자기의 성품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분별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념이란? 만사를 생각지 않음으로써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적 자각’의 상태입니다’

 

그릇 만들기: 불성행(佛性行)

부처의 성품을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어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행을 하는 자가 부처인 것입니다.

스스로가 불성을 지닌 신성한 존재임을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관음신앙

관음신앙 [觀音信仰]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타력(他力)적인 불교신앙의 한 형태이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본신인 성관음(聖觀音)과 세상에 두루 나타나는 변화신인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 여섯이 있다.

중국에서는 255년 〈법화삼매경 法華三昧經〉이 최초로 한역된 이후 관세음보살과 관계된 많은 경전이 번역되었다. 이들 경전들이 세간에 널리 유포됨과 함께 관음신앙이 널리 퍼져갔다.

그중에서 관음신앙의 근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이다. 여기서는 물·불의 재난이나 귀신·도적 등의 육체적인 어려움에서부터 탐·진·치 삼독(三毒)의 의지적 어려움 그리고 생남생녀(生男生女) 등 인간이 부딪히는 온갖 현실적인 고뇌에서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칭명(稱名)하면 관음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해탈을 얻도록 한다는 현세적 신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북조시대에 부량(傅亮)이 〈광세음영험기 光世音靈驗記〉를 편찬한 이후 많은 영험기가 편찬되었으며, 십일면관음·여의륜관음·불공견색관음·천수관음·준제관음을 비롯한 많은 보살상이 조성되었다.

우리나라 관음신앙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관음신앙과 함께 변화관음으로 십일면관음·양류관음(楊柳觀音)·천수관음이 있다. 본 얼굴 이외에 다시 11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십일면관음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상(慈相) 3, 진상(瞋相) 3,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3, 대폭소상(大爆笑相) 1, 불면(佛面) 1을 드러내보이는데, 이때 본 얼굴은 궁극의 지혜를 나타내며, 나머지 십일면은 방편을 나타낸다.

석굴암의 부조, 신라 국사(國師) 경흥(憬興)의 영험설화(靈驗說話) 등을 통하여, 이 관음에 대한 신앙이 옛날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류관음은 버드나무가지와 감로병을 든 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법문을 듣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흰옷을 입었을 경우에는 특히 백의양류관음(白衣楊柳觀音)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보살 그림 가운데 양류관음을 그린 것이 특히 많은 점으로 보아 이 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수관음은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이때문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로 불린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은 모든 중생을 살피고 구제한다는 것을 뜻하며, 구원의 보편성을 상징한다. 〈천수경〉의 보급과 함께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형태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성하였다. 많은 보살상과 영험설화를 그 증거로 들 수 있으며, 특히 〈삼국유사〉에 보이는 관음신앙에 대한 기록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밖에도 의상대사가 동해안 관음굴에서 〈백화도량발원문 白華道場發願文〉을 짓고 기도정진한 결과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서 낙산사(洛山寺)를 세웠다는 등 고승들과 얽힌 설화들을 통해서도 관음신앙의 성행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요원(了圓)에 의하여 〈법화영험전 法華靈驗傳〉이 편찬되었는데, 이는 당시에도 관음신앙이 매우 성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된다. 숭유억불정책에 의하여 불교의 교학적 발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조선시대에도 민간의 기복적 신앙으로서의 관음신앙은 단절되지 않았으며, 무속과 결합되어 생활 속 깊이 파고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기복적 신앙을 통하여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불교의 이러한 기복적인 양상은 만해선사(卍海禪師)가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에서 그 개혁을 주장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현대에도 관음신앙은 약화되지 않아서,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인 동해안의 낙산사, 남해안의 보리암(菩提庵), 그리고 강화도의 보문사(普門寺)를 비롯, 영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관음기도도량마다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사찰마다 대부분 관음전(觀音殿)을 따로 건립하여 관음보살상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거나,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돕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