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부처님 말씀]

“보이는 형상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맛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접촉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대념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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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처님 말씀]

“비구들이여,

요약하자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의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색취온),

느낌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수취온),

인식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상취온),

마음의 형성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행취온),

의식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식취온),

이것을 요약하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의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라고 한다.”

-대념처경-

[오늘의 부처님 말씀]

“죽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아! 우리가 죽음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 우리에게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을 겪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아! 우리에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 우리에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대념처경-

※ 병신년 가는 년 잘 보내시고,
정유년 오는 년 잘 맞이 하시길~^^

말(언설)에 대하여

 

 

말에 대하여

하나.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뒤’에서도 하지 마라.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아닌가’는 뒷담화인가 아닌가의 좋은 기준이다.
칭찬에 발이 달렸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있으니
상대가 앞에 없더라도 허물은 덮어주고 칭찬은 자주하라.

둘.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굿토커(good talker)’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굿리스너(good listener)’가 되는 것이다.
말을 독점하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들을수록 내 편이 많아진다.

셋.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된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옛말이다. 흥분하지 마라.
낮은 톤의 목소리가 힘이 되는 법이다.

넷.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해라.
상대방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보다는
상대에게 정말 필요하면서도 마음에 남는 말을 해라.

다섯.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을 하자.

여섯. ‘뻔’한 이야기보다 ‘펀(fun)’한 이야기를 해라.
자신이 하는 말에 스스로가 재미있어야 한다.
‘펀(fun)’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 즐겨야 한다.

일곱. 말을 ‘혀’로만 하지 말고, ‘눈’과 ‘표정’으로 말해라.
비언어적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언어적인 요소보다는
시각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여덟. 입술의 ’30초’가 마음의 ’30년’이 된다.
학교나 군대, 회사 등 여러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조직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말’이다.
내가 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아홉. ‘혀’를 다스리는 것은 나지만, 내뱉어진 ‘말’은 나를 다스린다.
말은 항상 신중하게 하라.
당신이 뱉은 말은 곧 당신의 그릇과 인격을 나타낸다.

관음신앙

관음신앙 [觀音信仰]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타력(他力)적인 불교신앙의 한 형태이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본신인 성관음(聖觀音)과 세상에 두루 나타나는 변화신인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 여섯이 있다.

중국에서는 255년 〈법화삼매경 法華三昧經〉이 최초로 한역된 이후 관세음보살과 관계된 많은 경전이 번역되었다. 이들 경전들이 세간에 널리 유포됨과 함께 관음신앙이 널리 퍼져갔다.

그중에서 관음신앙의 근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이다. 여기서는 물·불의 재난이나 귀신·도적 등의 육체적인 어려움에서부터 탐·진·치 삼독(三毒)의 의지적 어려움 그리고 생남생녀(生男生女) 등 인간이 부딪히는 온갖 현실적인 고뇌에서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칭명(稱名)하면 관음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해탈을 얻도록 한다는 현세적 신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북조시대에 부량(傅亮)이 〈광세음영험기 光世音靈驗記〉를 편찬한 이후 많은 영험기가 편찬되었으며, 십일면관음·여의륜관음·불공견색관음·천수관음·준제관음을 비롯한 많은 보살상이 조성되었다.

우리나라 관음신앙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관음신앙과 함께 변화관음으로 십일면관음·양류관음(楊柳觀音)·천수관음이 있다. 본 얼굴 이외에 다시 11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십일면관음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상(慈相) 3, 진상(瞋相) 3,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3, 대폭소상(大爆笑相) 1, 불면(佛面) 1을 드러내보이는데, 이때 본 얼굴은 궁극의 지혜를 나타내며, 나머지 십일면은 방편을 나타낸다.

석굴암의 부조, 신라 국사(國師) 경흥(憬興)의 영험설화(靈驗說話) 등을 통하여, 이 관음에 대한 신앙이 옛날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류관음은 버드나무가지와 감로병을 든 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법문을 듣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흰옷을 입었을 경우에는 특히 백의양류관음(白衣楊柳觀音)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보살 그림 가운데 양류관음을 그린 것이 특히 많은 점으로 보아 이 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수관음은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이때문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로 불린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은 모든 중생을 살피고 구제한다는 것을 뜻하며, 구원의 보편성을 상징한다. 〈천수경〉의 보급과 함께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형태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성하였다. 많은 보살상과 영험설화를 그 증거로 들 수 있으며, 특히 〈삼국유사〉에 보이는 관음신앙에 대한 기록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밖에도 의상대사가 동해안 관음굴에서 〈백화도량발원문 白華道場發願文〉을 짓고 기도정진한 결과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서 낙산사(洛山寺)를 세웠다는 등 고승들과 얽힌 설화들을 통해서도 관음신앙의 성행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요원(了圓)에 의하여 〈법화영험전 法華靈驗傳〉이 편찬되었는데, 이는 당시에도 관음신앙이 매우 성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된다. 숭유억불정책에 의하여 불교의 교학적 발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조선시대에도 민간의 기복적 신앙으로서의 관음신앙은 단절되지 않았으며, 무속과 결합되어 생활 속 깊이 파고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기복적 신앙을 통하여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불교의 이러한 기복적인 양상은 만해선사(卍海禪師)가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에서 그 개혁을 주장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현대에도 관음신앙은 약화되지 않아서,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인 동해안의 낙산사, 남해안의 보리암(菩提庵), 그리고 강화도의 보문사(普門寺)를 비롯, 영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관음기도도량마다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사찰마다 대부분 관음전(觀音殿)을 따로 건립하여 관음보살상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거나,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돕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