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선재문화답사(1) – 낙동강유역 문화와의 만남

2015년 선재문화답사(1)
<낙동강유역 문화와의 만남>
일자: 2월8일(둘째일요일)
장소: 창녕지역- 교동,송현동고분군, 창녕박물관, 창녕5일장,
술정리동삼층석탑, 관룡사 반야용선, 영산만년교.
출발: 부산진역앞 오전 8시
회비: 4만원(중식제공)
참가신청:
유상영 원장 – muni7011골뱅이hanmail.net / 공일공-2410-8200
이상미 단장 – leesealand골뱅이hanmail.net / 공일칠-728-5521
입금계좌 – 부산은행 101-2023-0751-07 선재 이상미

(일정표)
08:00 부산진역 앞 출발
09:40 교동,송현동고분군
11:00 창녕박물관
12:30 점심(창녕5일장)
13:30 술정리 동삼층석탑
15:00 관룡사 반야용선
17:00 영산만년교
18:00 부산으로 출발
19:30 회향

교동,송현동 고분군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일대에 걸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1963년 사적 80호의 창녕교동고분군과 사적 81호의 창녕송현동고분군으로 분리 지정됐으나, 지난해 7월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인접 지역에 있는 두 고분군를 통합하고 사적 제514호로 재지정했다.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이다. 창녕군 송현동 구릉에서부터 북쪽 교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십 기의 고분이 분포해 있다. 송현동 지역은 본래 80여 기의 큰 고분이 분포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거나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면서 현재는 16기 만이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3개 벽을 할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 뒤 막지 않은 짧은 벽을 통해 시신을 안치한 것이다. 그런 다음, 나머지 벽을 쌓아 막고 그 위로 흙을 쌓아올려 봉분을 만든 앞트기식 돌방무덤 형식이다. 내부 공간은 장방형이 되게 만들었다. 이런 무덤 형태는 가야시대 형식으로, 창녕 일대가 예전에는 가야의 영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교동고분군도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크고 작은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지만 주변이 경작지로 변하고 일본의 약탈적인 도굴행위로 인해 현재는 8기만 남아 있다.

창녕 고분군

창녕 고분군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국은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창녕의 비화가야다. 이들 중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 교동고분군이다.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과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으로 5~6세기 조성되었다. 이는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어 5세기경에 창녕지역이 신라 영역권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삼국유사〉의 오가야조에서는 〈본조사략〉을 인용하여 비화가야의 위치를 언급하면서 창녕과 고령이라는 2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화왕군조를 보면 “본래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군이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비화’와 같은 ‘비자화’ 또는 비사벌이 오늘의 창녕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비화가야는 창녕지역을 중심으로 있었던 나라임이 분명하다.
한편 비화가야의 모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 12국 중의 하나로 전하는 불사국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비화가야의 발달과 소멸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자료가 없다. 다만 신라가 창녕 지역에 555년(진흥왕 16) 비사벌주를 설치하고, 561년에는 창녕진흥왕순수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신라에 병합되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창녕박물관, 창녕5일장(수구레국밥)

창녕 수구레 국밥

창녕 수구레 국밥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수구레국밥은 순전히 한국식 음식으로서 여기에 등장하는 수구레라는 말은 소의 가죽과 그 안의 고기 사이에 있는 부위로서 고기도 아니고 비계도 아닌 특별하고 오묘한 것입니다. 쫄깃쫄깃하고 구수하지요. 소 한 마리 잡으면
수구레가 약 2㎏ 정도 나온다고 하네요.
수구레 국밥은 육수에다가 수구레와 선지를 대강 뭉텅뭉텅 썰어서 넣고 그 위에 우거지를 넣어 팔팔 끓여 파, 마늘등의 양념과 함께 간장으로 간을 맞춰 만드는 음식입니다.
이전에 고기 귀할때 가죽도 아니고 살도 아닌 이 부위를 버리지는 못하고 국을 끓여 먹었던 민생초들의 단백질 보충용 음식이었지만 이젠 아득한 추억을 일깨우는 향수음식이 되어 우리의 입맛을 돋우고 있습니다. 여름철 보양음식으로도 좋지만 추운 겨울날 대포나 소주  한잔과 곁들이면 더할나워없이 찰떡궁합인 음식입니다.

 

창녕박물관 (http://museum.cng.go.kr/)

창녕박물관

창녕박물관

** 박물관 관람후 꼭 뒤에 있는 계성고분이전복원관을 가세요!
가야 신라시대 고분이 잘 전시되어있습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술정리 동삼층석탑

술정리 동삼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크기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될 만한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위풍이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1965년 문화재관리국의 해체수리/복원 과정에서 사리 7과와 동제잔형 사리용기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탑이 크고 짜임새가 장중하며 훤칠해 기품 있게 보인다. 이 탑의 명칭에 동(東)자를 붙인 것은 한 절터 안에 2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서가 아니고, 술정리에 두 개의 탑이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탑의 높이는 5.75 m이다.

관룡사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치 좋은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창건연대로 미루어볼 때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의 창건설화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에 전해졌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가야불교사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그 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였는데, 보통 이를 창건으로 삼기도 한다.

관룡사

관룡사

삼국통일 뒤에는 원효(元曉)가 1,000명의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대도량을 이룩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관룡사 반야용선
관룡사 서쪽의 봉우리인 용선대 마루에 동향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불상은,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4각형에 가까우나 풍만하다. 목의 삼도는 가슴까지 내려와서 형식화를 지향하고 있다.

관룡사 반야용선

관룡사 반야용선

결가부좌한 모습에 통견의 법의는 몸에 밀착된 것이며, 몸은 통일신라의 초기 작품처럼 당당하지는 못하나 통통하고 안정감을 주며, 특히 하체의 가사문양은 형식화되고 있고 광배는 멸실되어 있다. 대좌의 상대는 반구형으로, 연화문이 앙련으로 조각되고 중대석은 8각이며 각 모서리에 주형이 있다.
이 불상 바로 앞에 하대석만 남아 있는 석등이 있는데, 불상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영산 만년교
창녕 영산의 남산에서부터 내려온 물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개천을 가로질러 대로가 이어지니, 사람들은 나무다리를 걸쳐 놓고 오갔고 때로는 왕에게 바칠 공물이 그 길을 지나갔다. 그러나 물이 넘치면 다리가 무너져 매번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날 고을의 백성들이 함께 도모하기를, “다리를 오래 보존하고 물의 흐름을 제압할 방법으로는 돌을 깎아서 다리를 만드는 방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재물을 모으고 돌을 깎아 다리를 놓으니 이로써 근심이 없어지게 되었다. 1780년 정조 4년이었다. ‘어찌하여 돌로 만들었는가. 오래도록 보존할 방법으로는 돌이 알맞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무지개 모양으로 깎았는가. 옮길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니, 그 공을 알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개울 위에 무지개 하나가 놓이게 되었다. 남천석교다.
100여년 후, 1892년 고종 29년에 마을의 현감 신관조가 다리를 중수한다. 그리고 ‘이 다리는 만년을 갈 것이다’라 기원하고 ‘만년교’라 이름 짓는다. 다리 앞에는 이러한 내력을 세긴 비석이 서있다. 세 동강 났으나 야물게 이어 붙인 ‘남천석교서병명’비다. 신관조는 멋을 알고 선정을 베푼 현감이라 전해지는데, 그로 인해 만년교는 ‘원다리’라 불리기도 한다.

영산 만년교

영산 만년교

** 창녕가**

입춘을 막 넘기고 창녕땅 밟으련다

용선대 부처님이 봄바람 내려주니

술정리 동탑 밑둥이 풀뿌리로 간지러워

타고 넘어드는 춘향(春香)은 그대로인데

속세의 인연은 한 자리에 머무름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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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2015년 선재문화답사(1) – 낙동강유역 문화와의 만남

  1. 선재 관리자 says: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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