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나를 내려놓는 명상(冥想)

류상영(선재 원장)

참나(眞我)를 찾는 일에 있어 일반화된 수행은, 진정한 나(참나)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낱낱이 놓아 가는 수행방법으로 명상(冥想)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세상 사람이 ‘나’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네 겹 정도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식의 주체, 마음, 몸, 그리고 자기 동일시한 대상의 내용인 ‘내 것’이라는 것이다. 나란 식주아(識住我), 심아(心我), 신아(身我), 경계아(境界我) 등 네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진정한 나를 알고자 나의 겉 부분부터 ‘어떤 것이 진정 나인가?’하고 물어보고자 한다. 양파의 핵심을 찾고자 껍질 한 겹 한 겹을 벗겨가듯…

경계아(境界我)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수히 자기와 동일시하며 집착하고 있는 몸 밖의 것들, 가령 부모, 형제, 자녀, 남편, 아내, 동산, 부동산 등과 그 외 아끼는 물건들을 말한다.
그리고 명예 권력 등의 소중한(?) 나의 경계아! 그것들이 본질적인 나인가 하고 사유해보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내려놓아야 한다. 쥐고 있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스런 자녀도 오히려 효과적으로 기를 수 있고, 재산이나 물질에 대한 관리도 효과적인 길이 보인다.

그러면 신아(身我) 그것이 나인가?
태생학적으로 몸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현미경을 동원해야 겨우 보이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의 합체로 시작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후 어머니의 태내에서 열 달 동안 먹었던 자양분과 태어나서부터 성장하면서까지 인연 지으며 꾸준히 섭취해온 음식들, 그것들에 길들여져 현재를 유지하고 있는 집합이 이 몸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여잡고 ‘너는 나야!’ 하는 자가 있다면 딱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몸을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생명체들은 당연히 여기는 생각이다. 내일이나 모레, 아니 언제쯤인가 화장터에서 연기속의 한 줌 뼛가루로 흩어질 이 몸이 ‘내가 아니다’라는 것은, 옛 선지식들이 간절하게 설파한 내용이다. 당연히 내려놓아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늘상 마음이라고 하는 심아(心我) ‘그것이 나인가?’
심아, 그것은 생각과 감정의 조합과정일 뿐이다. 생각-감정-욕구-의지-생각-감정-욕구-의지가 기능적으로 무수히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마음이다.
예를 들면 -꽃 한 송이를 본다(인지작용:생각), 기분이 좋다(감정), 꺾어서 집에 꽃아 놓고 싶다(욕구), 꺾고자 한다(의지). 인생사 전반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활동한다.
이때 이 생각들이 나인가? 그렇지 않다. 그 순간 일어난 생각 기능일 뿐이다. 감정, 욕구, 의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라는 것도 막연히 생각하면 무슨 실체가 있는 듯 하지만 잘 관찰해 보면 그런 식으로 몇몇 기능들이 얽혀서 일어날 뿐이다.
또 식주아(識住我)는 나일까?
산이 보인다. 무엇인가 보는 주체가 있으니까 그것이 산을 볼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철학에서는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의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나무가 있고 돌멩이가 있다면 그것을 만든 자(창조자)가 있을게 아니냐는 생각이 ‘브라만(Braman)’ 이라는 형이상학적 신(神)도 만들어 내었다. 이에 인도에서의 석존의 역사적 출현의 의미는 그 두 형이상학 개념에서 벗어낫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새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역할을 하는 ‘기능’이 있을 뿐 주체자라는 실체는 없다. 아트만이나 브라만과 같이,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상상의 관념창고에 설정하려 드는 것은 취약한 유아기적 인격에서 볼 수 있는 ‘믿음 심리’이다. 믿어버림으로써 어떤 욕구를 성취하고 편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믿음의 심리이다.
이러한 심리가 인간에게 유익한 배설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믿음 심리가 없다면 한강교를 건널 때마다 이상 유무를 검토해야 할 것이요, 이웃을 대할 때마다 흉악범이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많은 종교 교설이 믿음 심리를 전제로 하고 설파되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너무도 뿌리 깊은 믿음 심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이다.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 이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 단계적으로는 필요하지만 최종 단계의 성숙 과정에서는 그 철석같은 믿음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석존의 보리수 아래 수행이 바로 그 과정이었다. 그 당연하고 자명한 듯한 ‘나’라는 실체가 ‘연기(緣起)로 관계된 기능’에 불과함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참나’ 운운 역시 관념의 허상이다.
‘나’라고 버티어 봄직한 인식주체가 ‘나’가 아니요 한갓 기능임을 조견(照見)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자유요, 해방이다. 행여 유물론에 경도되어 ‘무언가 허탈할 것 같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여인네가, 노망한 시어머니를 고생고생하며 30년을 시중들다가 시어머니가 죽자 문득 서운하더란다. 이를 관념적으로 사색하지 않고 명상적으로 관조하면 사색 과정에서 따를 수 있는 어떤 허탈감은 극히 일시적이고 작위적인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명상의 깊이에 비례하는 충만감이 바로 드러날 것이다.
간혹 ‘아! 그러면 마지막에 드러나는 그 자유감, 해방감 등이 ‘참나’ 이겠구나!’ 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도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거기다 이름을 붙이고 할 일은 아니다. ‘진아’이니 ‘참나’이니, 이름을 붙이고자하는 ‘믿음 심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보다는 명상을 통해 깨어 있을 일이다.
석존의 유언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 하셨다.